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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두와 석영이 | 기대를 저버리는 홍루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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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석영 작성일18-12-22 10:35 조회12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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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를 저버리는 홍루몽

​김석영

 

간지럼 태우며 노는 시녀들

 어느 날 아침, 보옥이 잠에서 깨니 바깥방에서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궁금해 하는 보옥에게 습인이 와서 말해준다. 보옥의 시녀인 청문과 사월, 방관이 아침 댓바람부터 서로 간지럼을 태우며 놀고 있다는 것이다.

 보옥이 얼른 친칠라 털외투를 걸치고 나가 보니 세 명의 시녀가 이불도 개지 않고 속옷 바람으로 한 덩이가 되어 뒹굴며 장난치고 있었다. 사월은 붉은 능단의 가슴 가리개를 하고 낡은 옷을 대충 몸에 걸친 채 웅노의 겨드랑이를 간질이고 있었다. 웅노는 구들에 누워 천정을 바라보는 자세로 있었는데 꽃무늬가 알록달록한 몸에 달라붙는 옷을 입고 붉은 바지에 초록 양말을 신고 있었으며, 간지럼에 못 이겨 두 다리를 버둥대면서 숨이 넘어갈 듯이 깔깔대고 있었다.

─조설근, 『홍루몽』 4권, 나남, 2014, p.265

 보옥이 나가보니 아이들은 속옷 바람으로! 혹은 낡은 옷을 대충 몸에 걸친 채! 한 덩이가 되어 간지럼을 태우며 깔깔대고 있다. 이 장면, 뭔가 자극적지 않은가? 아리땁고 묘한 이미지들이 떠오르며,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가려는 걸까?’ 하는 기대를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그리고 방에서 나와 그 장면을 본 보옥도, 그들을 말린다며 합세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함께 뒤엉켜 논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때 마침 이환의 시녀 벽월이 찾아왔다.
 “어제 저녁 우리 아씨께서 손수건을 떨어뜨리고 가신 것 같다는데 혹시 못 봤어요?”

─같은 책, 같은 페이지

 다른 집의 시녀 하나가 찾아와 손수건 이야기를 꺼내니, 자연스러운 대화로 흘러가버리는 것이다!

나에게 익숙한 흐름

 홍루몽을 읽으면서 이런 장면을 종종 만났다. 성적인 느낌을 풍기는 것 같다가 ‘아니네?’하게 되는 장면들. 하지만 책이 나를 놀리려고 그런 장면들을 보여주는 거 같진 않다. 책은 단지 보옥이와 아이들이 놀고 있는 장면을 그렸을 뿐이다. 해석은 내 머릿속에서 나온다.
 ‘여자아이들’, 혹은 ‘여자아이들과 남자아이가 놀고 있는 모습’을 성적인 것으로 해석한 것은 순전히 나의 시선이다. ‘속옷 바람으로’, ‘한 덩이가 되어’, ‘붉은 능단의 가슴 가리개’, ‘대충 몸에 걸친 채’ 등의 단어들을 단서 삼아. 이렇게 책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내가 어떤 시선으로 그것들을 바라보는지, 거기에 어떤 기대를 하는지 말해주었다. 또 그 시선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도.
 나는 보고 싶은 것만 뽑아서 보고, 그것을 내게 익숙한 방식으로 해석한다. 보옥이와 여자아이들의 우정도 마찬가지다. 내 눈으로 보면 어떤 모습들은 선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들 나름의 관계를 새로운 눈으로 보려고 해도, 잠깐 방심하면 되돌아간다. 내게 익숙한 시선과 해석, ‘여자’를 그리는 데에는 성적인 의도가 있을 것이란 생각, 깊은 관계 혹은 남녀 간 우정에는 성(좁은 의미의, 육체적인 성)이 개입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강력한 전제 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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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속의 영역을 넓혀라!

 ‘여자’를, ‘남녀 간의 우정’을, ‘깊은 관계’를 말하려면 당연히 중심에 성이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홍루몽은 그런 나의 기대를 자꾸만 저버린다. 홍루몽은 그런 것들을 그리면서도, 성이 중심이 아니다. (그렇다고 성이 아예 배제된 것은 아니다. 다양한 사건들의 일부로써, 종종 성이 등장한다.)
 보옥이와 여자아이들 사이의 깊은 우정, 보옥이의 호기심 등 ‘에로스’(접속력)를 말하는 홍루몽의 매력은 거기에 있었다. 그 에로스(접속력)이 (좁은 의미의, 성기적-육체적)성을 넘나들 뿐, 거기에 포획되진 않는 것. ‘강한 접속’과 ‘성’ 사이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다채롭다.
 나는 이제껏 가장 강력한 접속은 성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손수건'으로 이야기가 흘러가자 당황했듯이, 그런 생각은 내가 '중요한 것'을 이미 상정하게 했다. 홍루몽의 수많은 이야기들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만드는, 오히려 그 이야기들에 접속하지 못하게 하는 생각. 성은 강력한 접속을 만들어내기보단 오히려 다양한 것들과의 접속을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일상에서도 마찬가지일 테다. 나의 접속력과 시선이 성에 포획되지 않으면, 훨씬 다채로운 관계와 사건들이 만들어질 것이다. (성기적)성에 포획되지 않고 접속영역을 넓히기, 곧 세상과의 접속력을 높이는 것이다.

 

 

 

홍루몽 씨앗문장, <석두와 석영이>는 이번 글을 끝으로 마무리됩니다.
한 번이라도!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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