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로드 2탄 소주편) 민심은 오자서를 잊지 않았다 > 쿵푸스온더로드

본문 바로가기


회원로그인

양력 2018/9/23 일요일
음력 2018/8/14

절기

쿵푸스온더로드

차이나라 기범 | (복수로드 2탄 소주편) 민심은 오자서를 잊지 않았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기범 작성일17-08-07 09:53 조회558회 댓글0건

본문

 

 

민심은 오자서를 잊지 않았다

 

 

 

부유한 도시 소주가 아니라, 오자서를 기억하는 소주를 가다


7월 18일, 상해에서 동칠이들과 헤어지고 현진이와 좀 더 여행을 다니기로 했다. 먼저 우리가 간 곳은 춘추시대 오나라의 수도였던 소주였다. 소주의 옛 지명은 고소로 춘추시대 오나라의 수도였다. 수나라 때 대운하가 만들어지고 강남의 물자가 북방으로 이동할 때 주요 거점지로 되면서 부가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지금도 “하늘에서는 천당, 땅에서는 소주와 항주 天上天堂 地下蘇杭”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소주는 중국에서 부유한 도시 중의 하나이다. 특히 정원 문화가 발달해서 지금도 수많은 관광객들이 정원들을 찾고 있다.

 

 82a7b77d9c9a623f5b6195227cfc7a3d_1502092 

소주 또한 소흥처럼 곳곳마다 이런 수향이 많았다

 

 

 하지만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이곳에서 오자서가 죽었기 때문이었다. 오자서는 본래 초나라의 명망 있는 가문 출신이었지만 간신 비무기의 모함으로 인해 평왕에게 일가족이 몰살당하고 자신만 도망쳐 복수를 다짐한다. 천신만고 끝에 오나라로 건너 온 오자서는 공자였던 광을 오왕으로 등극시키고(오왕 합려), 군사를 훈련시켜 초나라를 공격하게 된다. 초나라와의 전쟁에 승리한 오나라는 오자서를 중용한다. 하지만 오왕 합려가 월나라와의 전쟁 중 부상을 당해 죽고, 아들 부차가 왕위에 오르자 상황이 바뀌었다. 월나라를 굴복시킨 부차는 중원으로 눈을 돌린다. 중원을 정벌하여 패자가 위해서였다. 하지만 오자서는 먼저 월을 쳐야한다고 하면서, 북벌에 반대하였다. 결국 사이가 멀어진 오자서에게 부차는 촉루검을 내려 자결을 명한다. 자결하기 전 오자서는 유언을 남긴다. 

 

“나의 묘 위에 반드시 가래나무를 심어 관재로 삼도록 하라. 그리고 내 눈알을 도려내어 오나라 동문 위에 걸어두어 월나라 군사들이 쳐들어와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볼 수 있게 하라!”(『사기열전 상(上)』<오자서열전>, 55쪽, 까치본) 

 

 이 무시무시한 유언은 남기고 오자서는 자결한다. 원한과 집념으로 가득 찼던 오자서의 삶. 이를 보며 나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한 인간이 얼마나 힘을 가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힘을 가능케하는 것은 바로 욕망이라는 생각을 했다. 오자서를 움직인 욕망은 바로 원한이었다. 인간을 움직이고 변화하게 하는 힘 중 가장 강력한 힘이 아닐까? 이를 잘 보여준 인물이 바로 오자서였다. 그래서 오자서에게 끌렸고, 그가 생을 마쳤던 소주로 가고 싶었다.

 

따가운 강남의 햇볕 밑에서 오자서의 흔적을 찾다

 

우리가 도착한 것은 18일 밤이었다. 내일은 동칠이 여행을 하느라 고생했던 현진이는 숙소에서 쉬기로 했다. 핸드폰도, 언어도 되지 않았지만 혼자 돌아다녀 보기로 했다. 19일 아침, 일찍 일어나 밖을 나오니 벌써 햇살이 따가웠다. 먼저 갈 곳은 호구탑 풍경구였다. 버스를 타고 소주 시내 밖에 있는 호구탑 풍경구로 갔다. 매표소에 있는 온도계는 벌써 33도! 최고 기온은 38도란다! 맙소사, 강남의 더위를 너무 쉽게 봤다. 조금 걸었을 뿐인데 땀이 흐르고 쨍쨍한 햇살에 자연스레 눈이 찡그려졌다.
 

82a7b77d9c9a623f5b6195227cfc7a3d_1502091

청명했던 하늘, 그만큼 더웠던 날씨!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이곳에 오왕 합려가 묻혔다고 전해지는 연못, 검지(檢池)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풍경구 주위를 돌아보니 이 곳에 손자(손무) 사당이 있었다. 오왕 합려를 도와 초나라를 공격하는데 큰 공적을 세웠던 그. 하지만 이후의 행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여러모로 미스테리한 인물이다. 그래서 제나라에서 온 군사고문이라는 말도 있고, 합려가 죽은 후 은퇴를 했다는 말이 있다. 어쨌든 그가 남긴 『손자병법』 13편은 병법의 고전으로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사당엔 지피지기(知彼知己)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호구탑 풍경구를 살펴보니 손자에 대한 기념물들이 꽤 있었다. 바로 여기에 합려의 무덤가 있기 때문에 그 시대에 활약했던 손자를 기리는 사당이 이 곳에 만들어진 것 같았다.

 

82a7b77d9c9a623f5b6195227cfc7a3d_1502091

생각할 수록 가장 어려운 말, 적을 알고 나를 아는 것! 

 

82a7b77d9c9a623f5b6195227cfc7a3d_1502091

이 곳이 과연 합려의 무덤이었을까? 왠지 모를 으스스한 분위기가 난 건 사실!

 

검지에 가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두 절벽 사이에서 푸른 빛이 도는 호수였다. 전해지는 얘기로는 오왕 합려가 죽은 후 이 연못에 수장을 하고 검 수천 개를 넣었다고 한다. 검과 물! 오월 문화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두 단어다. 오월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중국 역사에 갑자기 등장했다. 그들의 강력한 군사력을 가졌던 이유 중 하나는 강력한 무기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그 중에서도 오나라는 어장, 촉루, 간장, 막야 등 유명한 검 생산지로 유명하다. 이곳에는 오왕 합려가 받은 검을 시험했던 두 조각이 난 돌도 있다. (물론 나중에 만들어진 거겠지만!) 오월 지방은 호수와 강이 많았고, 바다에도 인접해 있다. 그래서 해상이나 강을 이용한 교역도 많았고 수군도 강력했다. 바로 이 수군을 통해 북방의 제후들을 공격했던 것이다. 합려가 수장되어 있는 검지는 푸른 검기가 서려있는 듯 했다.

 

82a7b77d9c9a623f5b6195227cfc7a3d_1502091

합려가 검을 내려쳤다는 돌. 중국인들도 참 허세가 심하다

 

호구 풍경구를 나와 서문(胥門)까지 무작정 걸어서 갔다. 서문은 원래는 옛 고소성의 서문(西門)이었지만 후에 오자서를 기리기 위해 이름을 서문(胥門)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걸어가면서 생각을 했다. 부차에게 죽음을 맞은 오자서는 살 기회가 있었다. 그 전에 오자서가 제나라로 사신을 간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오자서는 아들을 제나라에 남겨두었다. 이 사건 때문에 부차의 분노를 사 오자서는 결국 죽고 만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오자서는 스스로 죽음을 자초했다고 볼 수 있었다. 오자서의 이 선택이 나는 의문이었다. 복수도 다 이뤘던 그였다. 그렇다면 그도 제나라에 갈 수 있지 않았을까? 왜 그는 오나라를 떠나지 않았을까? 옛 선왕의 의리 때문에? 하지만 이런 생각은 길게 가지 못했다. 길거리가 너무 더워서 아무 생각도 안 났기 때문이었다.

 

7월의 소주 시내의 열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정오 무렵이어서 그늘도 찾기 힘들었다. 얼굴이 타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2시간 남짓 걸어가니 땀은 주루룩 흐르고, 후끈 달아오른 열기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강렬한 햇빛에 눈도 먼 것처럼 앞이 잘 안 보였다. 

 

서문에 ​도착하기 전 어느 매점에 들어가 시원한 음료수를 벌컥 들이마시니, 그제야 세상 밖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열기는 난생 처음 경험했다. 다른 곳을 돌아다닐 때도 덥긴 했는데, 이곳은 덥다 못해 어지러울 정도였다. 잠시 쉰 후 서문 쪽으로 갔다. 그 곳에는 강 하나가 옛 성의 해자로 흐르고 있었는데, 그 강이 바로 서강(​江)이었다. 오왕 부차는 오자서가 죽기 전 자신에 대한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는 것을 알자 분노해서 그의 시체를 말 가죽에 담아 강에 버렸다. 오자서의 시체가 버려진 강이 바로 이곳 서강이다. 이처럼 소주 시내를 조금만 돌아다녀 보면 오자서의 이름을 딴 성문, 강, 동네, 도로 등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늘날까지도 오자서에 대한 소주인들의 사랑은 각별해보였다.

 

82a7b77d9c9a623f5b6195227cfc7a3d_1502091

오자서의 석상, 햇볕 때문에 내 얼굴이 하얗게 나왔다

 

서문에 도착했지만 보수 중인지 문은 멀리서밖에 볼 수 없었다. 대신 그 앞에 있는 공원에는 오자서 석상이 있었고, 뒤에는 축성을 지휘하는 오자서와 열심히 돌을 나르고 있는 소주 민중들의 모습이 있었다. 그 곳에서 오자서가 고소성(소주의 옛 이름)을 계획하고 축성을 지휘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 이 성을 오자서가 만든 것. 그래서 소주 시민들의 오자서에 대한 사랑이 남다른 것이었다.


 

82a7b77d9c9a623f5b6195227cfc7a3d_1502091

 

공원에 있던 기념문, "백성들은 잊지 않는다" ​

 

 

그런데 공원에 있는 기념문 위에는 이런 단어가 있었다. “민능불망民能不忘”, 백성들은 잊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이 문은 원래 오자서를 기리기 위한 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자서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던 나는 이 말을 보고 “백성들이 오자서의 죽음을 잊지 않는다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성들이 여러 지명에 그의 이름을 따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쯤되자 민중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오자서를 잊을 수 없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에 숙소로 돌아온 나는 현진이와 같이 밥을 먹었다. 지난 열흘 동안 동칠이 여행의 가이드를 맡았던 현진이는 피곤해 보였다. 그래서 오후에도 나 혼자 돌아다니기로 하고 현진이는 쉬면서 주위를 돌아보기로 했다. 다음 목표지는 오자서 사당과 오자서 묘였다. 강에 빠져 죽은 오자서의 묘가 있을 리 없다. 하지만 한 번 가보기로 했다. 시내 근처에 있는 오자서 사당에 비해 오자서 묘는 꽤 멀었다. 태호 근처에 있어서 버스로 2시간 정도 거리였다. 언제 문을 닫는 지도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일단! 가보기로 했다.

 

82a7b77d9c9a623f5b6195227cfc7a3d_1502091

단문 풍경구


82a7b77d9c9a623f5b6195227cfc7a3d_1502091
82a7b77d9c9a623f5b6195227cfc7a3d_1502091

아무도 없었던 오자서 사당

 

지하철로 오자서 사당이 있는 단문풍경구로 갔다. 고소성은 수천년의 역사로 만들어진 역사적 도시이다. 하지만 성벽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명, 청나라 때 만들어진 성문들만 남아 있었다. 그 중에서 단문은 배가 다닐 수 있는 성문이었다. 수로가 많았던 도시였던만큼 배가 오고 갈 수 있는 통로가 있었던 것이다. 단문풍경구에는 탑과 건물들, 그리고 호수가 있었다. 오자서 사당은 그 곳에서도 후미진 아무도 찾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외곽에 있었다. 실제로 그곳에는 지키는 사람도 없었다. 그 앞에 서서 나는 내가 왜 오자서에게 끌렸는지 생각했다.

 

82a7b77d9c9a623f5b6195227cfc7a3d_1502092
나는 왜 오자서에게 끌렸을까?

 

 

처음 『사기』를 읽었을 때 <오자서열전>을 읽으면서 인상적인 구절이 있었다. 오자서는 자신의 아버지와 형의 복수를 위해 초나라를 공격하고 수도를 침공한다. 하지만 자신의 가족을 죽였던 평왕은 이미 죽어 묘에 묻혔고, 아들인 초 소왕은 도망친 후다. 어디에도 자신의 복수를 풀 데를 찾지 못했던 그는 초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그의 시체에 채찍질 300대를 한다. 초나라에 있었을 때 친구였던 신포서는 그의 행동을 나무랐다. 이에 오자서는 사과하면서 한 마디를 한다. “일모도원(日暮途遠)!”, 해는 지고 갈 길이 멀어 도리에 어긋난 짓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 한 마디로 오자서는 자신의 마음을 말했다. 도망자 신세가 되어 걸식까지 하고, 죽을 위기를 수 없이 겪었던 그다. 이런 고초를 이겨내고 초나라에 쳐들어왔지만 복수의 대상은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런 행동을 한 것이다. 광기 서린 행동이었지만 그가 한 말에는 씁쓸함이 담겨져 있었다. 이런 오자서의 캐릭터에 나는 흥미를 느꼈다. 오자서는 단순히 복수에 매몰된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실제로 오자서가 복수에 미쳐 눈에 가리는 것이 없이 행동하는 자였다면 백성이 그토록 그를 기리진 않았을 것이다. 계속된 전쟁으로 오나라 민중들은 지쳐 있었다. 또한 강대해진 오나라에 대해 북방의 나라들이 대비책을 세우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 상황에서 부차의 북벌은 오나라 민중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실패할 공산이 큰 것을 오자서는 알고 있었다. 이처럼 민중의 마음과 시세를 오자서는 정확히 파악하고 부차에게 간했던 것이다. 하지만 부차는 이런 민중의 마음과 시세를 보지 못했다. 북벌을 해서 패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82a7b77d9c9a623f5b6195227cfc7a3d_1502093

오자서묘 옆을 흐르던 서강​

 

 

82a7b77d9c9a623f5b6195227cfc7a3d_1502093
해가 지고 있는데 오자서묘에 이르지 못해 초조했다

 

오자서 사당에서 오자서 묘로 가는 길은 2시간이나 걸렸다. 중국어도 제대로 못하고, 인터넷도 안 되는 마당인지라 일단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곳으로 가다보니 이렇게 늦어진 것. 어느새 해는 점점 지고 있었다. 아직 혼자 돌아다닌 게 낯설었던 나는 되도록 혼자 밤에 돌아다니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점점 어두워지자 마음이 초조해졌다. 그야말로 일모도원이었다. 뛰다시피해서 오자서 묘가 있는 곳으로 갔다. 옆에는 태호에서 나오는 서강이 흐르고 있었다. 조금 더 가면 태호였다. 그렇게 힘들게 도착했으나 문은 닫혀 있었다. 맙소사! 하지만 오자서 묘를 못 본 것에 대한 별 후회는 없었다. 더위와 낯선 곳을 혼자 돌아다닌다는 생각에 긴장감에 지쳐 있었기 때문에 무사히 돌아오기만 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고생 끝에 돌아온 숙소에서 현진이가 나를 반겨줬다. 저녁 9시도 안 됐지만 완전히 뻗은 나는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고소대 옆 석호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다

 

다음날 일어난 나는 고소대를 갔다. 역사서에 따르면 부차는 호수가에 고소대라는 건물을 짓고 수군을 훈련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고소대가 지어졌다는 위치는 설이 분분하다. 석호에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태호에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찾아보니 그 당시의 고소대는 아니지만 석호 근처에 고소대가 있었다. 그래서 석호로 가기로 했다. 석호는 소주 시내 남쪽에 있는 호수인데 크기도 꽤 컸다. 

 

 

 82a7b77d9c9a623f5b6195227cfc7a3d_1502093 

소주에서 이 정도 햇볕은 기본! 내 얼굴이 빛나고 있다

 

오늘도 여전히 햇볕은 강렬했다. 소주에 온 지 하루 만에 얼굴과 팔이 벌겋게 익었다. 근방에 도착해 물어보니 여기에 고소대는 없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풀이 우거진 건물을 가르키며 문을 닫았다고 한다. 그곳으로 가니 폐관이 된 듯 매표소는 닫혀 있고, 건물에는 넝쿨과 풀이 무성했다. 간판에 고소대(姑蘇臺)라고 써져 있는 걸 보니, 이 곳이 맞기는 했다. 풀들에 의해 녹색 빛이 더 많은 고소대 옆에는 석호가 햇빛에 비쳐 빛나고 있었다. 

 

 82a7b77d9c9a623f5b6195227cfc7a3d_1502093

가까스로 찾아낸 고소대! 하지만 폐관돼서 밖에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82a7b77d9c9a623f5b6195227cfc7a3d_1502093

시내 옆에 있던 석호. 바람과 물내음이 더위를 식혀 주었다

 

 그냥 가기 아쉬워 석호에 있는 공원에 들렀다. 사람도 별로 없이 한적한 공원이었다. 물가에 가니 물내음이 바람을 타고 나에게 다가왔다. 시원함 바람과 탁 트여진 시야로 마음도 상쾌해졌다. 이곳에서 배를 띄우고 수군을 훈련시켰어도 믿을 만큼 큰 호수였다. 이곳에서 훈련된 수군으로 부차는 운하를 만들어 제나라까지 배를 타고 공격했다고 한다. 여기서 부차는 패자가 되려는 욕망을 키워갔다. 하지만 그 욕망은 결국 오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했다. 욕망이 자신을 못 보게 한 것이다.

 

오자서가 만든 성은 이 곳이 아니다!?

 

이후 나는 상문(相門)으로 갔다. 이유는 간단했다. 상문이 바로 옛 고소성의 동문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오자서가 죽으면서 자신의 눈을 동쪽 문에 매달아 월나라 군이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모습을 보게 하라고 하지 않았나. 그 곳에 가서 동문에 매달려 있는 오자서의 눈을 상상해보고 싶었다. 

 

 

 

82a7b77d9c9a623f5b6195227cfc7a3d_1502093

옛 소주성의 동쪽 문인 상문. 그 안에 장성박물관이 있었다​

   

82a7b77d9c9a623f5b6195227cfc7a3d_1502093

오자서가 만든 성은 지금보다 더 서쪽, 태호 옆에 있었다. 서강 밑에 서산이 보인다

 

상문에 가니 다른 문들과 다르게 꽤 긴 성벽이 남아 있었다. 상문 안으로 들어가니 그 안에 장성박물관이 있었다. 고소성의 역사가 기록된 곳이었다. 그곳에서 최근에 발굴된 유적과 유물에 따르면 지금 고소성은 오자서가 만든 성이 아니라 월나라 때 만들어진 성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오나라 때 만든 성은 여기로부터 더 서쪽, 태호 근처에 있었다는 것! 그곳은 바로 어제 내가 갔던 오자서 묘가 있던 곳 근처였다. 발굴단이 추정하는 옛 고소성 터 안에는 서강이 흐르고 있었다. 한참 지도를 바라보니 그 성 밑에 서산(胥山)이라는 산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은 옛 오나라 성 바로 남쪽으로 서강을 끼고 있는 산이었다. 오자서가 죽은 걸 슬프게 여긴 오나라 사람들이 이 산에 사당을 만들어 그를 기렸고, 그래서 서산이라 한다는 얘기를 사기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래서 여행을 준비할 때 서산을 가보려 찾아봤지만 그런 지명은 없다고 나와서 포기했었다. 알고보니 지금은 그 산을 서산이라고 부르지 않고 청명산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서산에 올라 태호를 바라보다


이를 안 나는 갑자기 서산을 올라가고 싶어졌다. 숙소로 돌아온 나는 현진이와 대책을 모의했다. 날씨는 40도에 육박했고, 체감온도는 이보다 더했다. 일단 오후에 소주박물관을 가고, 서산은 나 혼자 가기로 했다. 그리고 6시 전까지 가면 오자서묘도 볼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82a7b77d9c9a623f5b6195227cfc7a3d_1502093

82a7b77d9c9a623f5b6195227cfc7a3d_1502093 


82a7b77d9c9a623f5b6195227cfc7a3d_1502093

볼 것도 많고, 사람도 많았던 소주박물관, 시간 관계상 춘추전국시대 유물들만 봤었다

 

소주 박물관에 들어가니 도자기, 옥, 그림 등등 보기만 해도 세밀하고 아름다운 유물들이 있었다. 말했다시피 소주는 운하 무역을 통해 부를 쌓아올려, 이런 귀금속과 사치품들이 무척 많았다. 여기 있는 것 하나만이라도 우리나라에 가지고 오면 국보가 될만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관심 있었던 것은 춘추시대의 유물들이었다. 소주는 오, 월, 초나라가 차례로 차지했던 지역이었다. 그래서 출토된 청동 검에는 월나라, 오나라, 초나라 왕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내 눈 앞에서 2500년 전 왕들이 휘둘렀을 검과 사용했을 청동 그릇 등을 보니, 그들은 오늘 날 못지 않게 화려하고 세련되게 살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박물관을 나오고 나서 더위에 약한 현진이는 숙소에 있고, 나 혼자 다시 오자서 묘로 가기로 했다. 두 번째 가는 길, 하지만 역시 닫혀있었다! 왜! 5시 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이가 없었지만 어차피 내 눈 앞에 보이는 저 산, 서산에 오르는 것이 목적이었다. 눈 앞의 산을 향해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지도상에서는 작게 보였지만, 꽤 큰 규모의 산이었다. 산 위에는 송전탑이 흉물스럽게 이어져 있었다. 송전탑 때문인지 산으로 들어가는 길은 모두 차단되어 있었다. 이를 보면서 궁금했던 점이 풀렸다. 소주인들에게 오자서는 가장 인기있는 인물이었다. 그의 이름을 딴 마을, 도로, 강도 있었다. 그런데 그의 사당이 있었다는 서산의 이름은 왜 남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다. 직접 본 산 꼭대기에는 송전탑들이 있어서, 외부인들의 출입을 금하고 있는 듯 했다. 만약 이 곳에 오자서 사당을 다시 만들고 풍경구로 만든다면 보기 흉한 송전탑을 옮겨야 할 수도 있을 상황이었다. 그래서 서산이라는 이름 대신 다른 이름으로 이 산을 불렀던 것이 아니었을까?

 

82a7b77d9c9a623f5b6195227cfc7a3d_1502093

서산 위에는 흉물스런 송전탑이 있었다​

 

82a7b77d9c9a623f5b6195227cfc7a3d_1502094

공동묘지가 된 서산

 

아무튼 그런 까닭으로 서산 위에 올라가는 건 쉽지 않아 보였다. 산을 끼고 계속 걸으며 옆 길이 있는지 살폈다. 길 건너편 숲을 건너면 바로 태호였다. 얼핏 보이는 태호의 크기는 바다처럼 넓어보였다. 좀 더 산을 따라 가보니 들어가는 문이 있었으나 이미 닫혀 있었다. 간판에는 ‘청명공묘(淸明公墓)’라고 되어 있었다. 쇠창살 사이로 무덤들이 보였다. 그렇다. 지금 이 산은 공동묘지가 됐던 것이다. 그래서 청명산이 됐던 것. 오자서를 기리는 산이 이제는 공동묘지가 되었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 곳을 지나처 얼마나 걸었을까 서산산장이라는 표석이 보였다. 어떤 곳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문은 열려 있었고,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안으로 들어가 산으로 향했다. 주위의 건물들을 보니, 미니카, 낚시터가 보이는 걸 보니 유람원 같았다. 하지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끝까지 가니 산으로 이어지는 찻길이 있었다.

 

 82a7b77d9c9a623f5b6195227cfc7a3d_1502093

서산산장 입구, 안에는 유원지처럼 꾸며져 있었으나 아무도 없었다​

 

 

82a7b77d9c9a623f5b6195227cfc7a3d_1502094

 

82a7b77d9c9a623f5b6195227cfc7a3d_1502094
산에 오르면서 서서히 드러난 태호의 모습

 해는 이미 지고 있었다. 사람은 아무도 없어서 무서울 정도다. 해가 지기 전 올라갔다 내려 와야했다. 더운 날씨와 바닥이 난 체력으로 산에 올라가는 것은 무척이나 힘들었다. 땀을 너무 흘려, 진액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20분 정도 올라가 뒤를 돌아보니 나무 사이로 태호가 태양의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쭉 펼쳐져 있는 호수, 그 곳을 오가는 배가 작게 보였다. 오자서를 기리기 위해 이 곳에 올라갔던 사람들도 이 풍경을 봤겠구나! 어쩌면 오자서 또한 살아 생전 이 풍경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드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서산 위에서 바라보는 태호의 풍경은 저 밑에서 사는 한 개인 한 개인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를 다시금 알게 해주었다.

 

 82a7b77d9c9a623f5b6195227cfc7a3d_1502093

 산에 올라가 지쳐버린 나. 결국 내려갈 땐 중국 사람처럼 배를 드러내고 내려갔다;;

 

시대의 흐름을 날카롭게 포착하고, 강국이었던 초나라를 쳤던 오자서. 일개 개인의 복수심이 한 나라를 파멸에 이르게 했을만큼 그의 집념은 대단했다. 하지만 그도 한 개인이었다. 시대의 흐름과 부차의 패자에 대한 욕망 등을 그 혼자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오나라가 멸망할 것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떠나지 않았고, 오나라에서 죽을 것을 택했다. 자신의 죽을 자리를 자신의 성공과 실패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이곳, 소주로 정한 것이다. 이런 오자서의 죽음에 민중들은 공감했다. 왜 그랬을까? 계속된 전쟁과 토목공사로 지칠대로 지쳐버린 자신들이, 오자서와 같다고 여겼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왕에게 미움을 사 죽은 오자서를 기리는 사당은 바로 민중에 의해 만들어졌다. 어쩌면 오자서의 말은 바로 당시 민중들의 말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끝내 오나라는 월나라에게 멸망당하고, 이때 오자서가 만든 성은 쑥대밭이 됐다. 월나라는 지금의 소주 시내에 성을 지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민중들은 그를 잊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냈고, 그 결과 지금의 소주성을 오자서가 지었다고 그들은 믿게 되었다. 그래서 오자서가 만들었던 도시가 지금의 소주성이 아니라더라도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그들이 잊지 않은 것은 오자서가 쌓은 성이 아니라 오자서가 그 당시 민중들이 함께 공유했던 마음이기 때문이다.

 

82a7b77d9c9a623f5b6195227cfc7a3d_1502094

민중들은 오자서를 잊지 않았다

 

 

소주 여행은 뜨거운 날씨, 혼자 낯선 곳을 가는 긴장감, 무리한 이동 등으로 인해 체력적으로 힘들었다. 하지만 이틀 내내 오자서의 흔적을 찾아가면서 그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다는 것이 좋았다. 이 정도 고생을 해야만 겨우 그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걸까. 아무튼 소주의 뜨거운 햇볕과 서산에서 바라본 태호의 모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mail : mvqblo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