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토토 > 쿵푸스온더로드

본문 바로가기


회원로그인

양력 2018/11/16 금요일
음력 2018/10/9

절기

쿵푸스온더로드

나의 영화, 나와 영화 | 영웅 토토

페이지 정보

작성자 벼리 작성일15-09-17 00:12 조회1,952회 댓글0건

본문

​​

영웅 토토

 

a김지현(목요 감이당 대중지성)

 

지난 <토토의 천국> 편을 쓸 때 주인공 이름을 헛갈려 잘 못 썼다. 주인공 이름은 토토가 아니라 토마다. 이 영화의 원제는 <영웅 토토 Toto Le Heros>인데, 그건 토마가 즐겨보는 텔레비전 첩보드라마의 제목이기도 하다. 토토는 그 드라마에 나오는 비밀경찰이고 토마가 그렇게 되기를 꿈꾸는 영웅이다. 토마는 꿈꾸던 대로 영웅 토토가 되어 토토로 살다가 토토로 죽게 되니, 사실상 토마는 토토인 셈이다.    

   토마 나이에는 온전히 이야기 속 인물이 되는 게 가능하다. 나도 그랬다. 나 어릴 적에는 플랜더스의 개, 명견 래시, 달려라 벤지, 명견 호보 같이 인간과 개의 우정과 모험을 다룬 이야기들이 많았다. 나는 그 이야기들을 읽을 때마다 주인공이 되어 래시, 벤지, 호보와 함께 갖은 난관을 헤쳐 나가는 모험을 했다. 나는 개들에 대한 오해와 냉대에 맞서 싸웠고, 어떤 고난 속에서도 우리의 우정을 저버리지 않았으며, 마침내 죽음까지도 함께했다. 만약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나는 그와 똑같이 용기 있고 희생적으로 행동할 것이었다. 그런데 그걸 증명할 기회가 통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었다. 

 

 

22164e8ed444f324c31529675428e164_1442416


<영웅 토토 Toto Le Heros>

 

   토마 역시 그러했다. 그는 사랑하는 엘리스 앞에서 영웅 토토이고 싶어 조바심쳤다. 기회는 빨리 찾아왔다. 엘리스가 불을 지고 죽음을 향해 뛰어든 것이다. 그 순간 토마는 영웅 토토가 되어 그녀를 구해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속수무책으로 불길을 바라보기만 했지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더 나쁜 건 엘리스를 죽음으로 내몬 게 바로 토마의 속 좁은 질투였다는 것이다. 토마는 열등감덩어리의 소년일 뿐 영웅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은 너무 온전히 비극적이지 않은가. 영웅서사에 위엄을 부여하는 건 그 비극성이다. 사건을 전형적인 비극으로 윤색한 건 토마 자신일 것이다. 그는 끝내 영웅이기를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우리 집엔 똘만이란 개가 있었다. 래시, 벤지와는 달리 영리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깊이 있는 우정을 나누기에는 여러 가지로 부족함이 많은 개였지만, 그래도 아침이면 교문 앞까지 따라오고 학교 끝나면 같이 동네를 뛰어다니는 다니는 좋은 친구였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다. 똘만이를 데리고 공터에 갔는데, 딴 데 정신이 팔려 돌아다니다 와보니, 그 조그만 이마에 피가 베나오고 있었다. 똘만이를 안고 서둘러 집으로 가면서, 나는 겁이 나 죽을 지경이었다. 엄마한테 야단맞을까봐 무서웠던 것이다. 나는 엄마에게 공터에 있던 오빠들이 똘만이한테 돌을 던졌다고 말했다. 거짓말이었다. 그 오빠들은 오히려 똘만이가 다친 걸 보고 같이 걱정을 해주었었다. 나는 개가 다친 게 내가 잘 못 돌봐서가 아니라, 덩치 큰 오빠들이 달려들어 어째볼 수 없는 일이었던 것처럼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날 엄마는 나를 야단치지 않았고 개도 크게 다친 것은 아니었다.

 

 

22164e8ed444f324c31529675428e164_1442416


똘만이가 다치자 덜컥 겁이 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개가 다친 상황에서 오로지 내가 야단맞을까봐 그것만 걱정했다. 죽음 앞에서도 신의를 지키리라 자신했건만, 고작 엄마한테 야단맞는 게 무서워 신의를 저버린 것이다. 나는 내가 믿고 있던 것과는 달리 용기 있고 희생적인 영웅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때 내가 얼마나 상처받았는지는 토마가 알 것이다. 충격적인 자각에도 불구하고, 처음엔 어떻게든 이야기 주인공으로 남아 있어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한번 그렇게 보기 시작하니, 나와 영웅 사이의 거리가 똘만이와 명견 래시의 그것만큼이나 멀고멀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증거들이 속속 발견됐다. 그 많은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만약 나의 현실에 비극적 터치를 가할 요소가 희미하게라도 있었다면, 그 비극성이 나의 현실을 이야기로 만들어주었을 것이다. 토마가 그랬듯이, 나는 내가 뒤바뀐 아이였으면 하고 바랬다. 그러나 보는 사람마다 내가 엄마를 쏙 빼닮았다고 말했다. 나는 내게서 이야기 주인공에게 합당한 면모를 찾아내는 데 실패했고, 결국 초라한 나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이야기 밖으로 추방됐다.

   역사뿐 아니라 인생도 반복된다. 몇 년 전의 일이다. 우리 집 개 동동과 안양천변으로 산책을 갔다. 그런데 잠깐 다른 데 정신이 팔린 사이에 진돗개가 동동을 낚아채 물고 흔들기 시작했다. 나는 송곳니 뾰족한 진돗개 아가리에서 동동을 구해낼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아악 비명을 지르며 옆에 서있던 진돗개 주인을 쳐다보았다. 동동을 구해내란 뜻이었고 그가 나서서 진돗개 아가리를 벌렸다. 동동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초등학교 때처럼 괴롭지는 않았다. 뭐든 처음이 힘든 법이라 그 후로 비슷한 일을 겪을 때면, ‘내가 그렇지 뭐’하고 좀 멋쩍어하다 만다. 그날 우리는 여느 날처럼 왕복 3시간을 걸어 한강까지 다녀왔는데, 동동의 갈비뼈가 부러진 줄을 알게 된 건 한참 후의 일이다. 

   나 자신을 받아들였다고는 해도 늘 마음 한 구석에 열패감을 안고 살았고, 그럴수록 영웅을 향한 선망은 깊었다. 예전에는 물에 빠진 개를 구하려다 죽는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나는 그들에 대한 기사를 접할 때마다, 내가 헌신짝 버리듯 저버린 신의를 위해 자기 몸을 아끼지 않은 아이들에 대한 존경심을 금할 수 없었다. 해외토픽에서 어떤 개 주인이 자기 개를 물어 죽인 개를 물어 죽인 사건을 접했을 때도 그 미친 의리에 고개가 숙여졌다. 그들의 희생이 사회적으로 높이 평가받는 번듯한 대의를 위한 것이 아니기에 더 고귀하게 여겨졌고, 인명을 구한 이들에게 그러하듯 그들에게도 ‘의인’ 칭호가 부여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언젠가 한번쯤은 의인을 직접 만나게 되길 소망했다. 그런데 정말로 의인을 만나게 됐다.  

 

 

 

22164e8ed444f324c31529675428e164_1442416


의인이라면 이런 영웅들?

 

   동동이 또 진돗개에게 물렸다. 이번에는 엄마가 같이 있었는데 동동은 다친 데가 없었고, 대신 엄마가 개에 물려 입원을 했다. 전화를 받고 병원에 가보니, 엄마가 다리에 붕대를 감고 누워있었다. 입원할 정도는 아닌데, 보험금 때문에 참고 누워있는 거라고 했다. 사고를 낸 진돗개는 나도 잘 아는 놈이다. 놈은 우리가 매일 산책 다니는 길가 집에 산다. 놈은 담이 없는 마당에 묶여있는데, 동동은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아슬아슬한 거리까지 접근해 알짱대며 약을 올렸고, 놈은 잡히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기세로 짖어대곤 했다. 그런데 방심한 동동이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서자, 놈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동동을 잡아채 물고는 사정없이 흔들어댔던 것이다. 그때 엄마가 달려들어 놈의 아가리를 이단 옆차기로 돌려 차 동동을 구해내고 그만 자신의 다리를 물린 것이다. 의인 김상춘! 나는 전에 없던 존경심으로 엄마를 쳐다보았다. 

   안양천 사건으로 인해 존경심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내가 개에게 물릴까봐 안전하게 비명만 지르고 있을 때, 엄마는 자기 몸을 사리지 않고 개에게 달려든 것이다. 우리는 같은 사건에서 다르게 행동했다. 그런데 엄마의 얘기를 들어보니, 우리는 상황에 대한 인식부터가 전혀 달랐다. 엄마는 몇 번이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정말 큰 일 날 뻔 했다고, 자기가 아니었다면 동동은 틀림없이 죽었을 거라고, 동동이 다친 데 없이 무사해서 너무 감사하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안양천에서 동동이 진돗개에게 물렸을 때, 그게 동동의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진돗개 주인이 옆에 있어서기도 했지만, 그 상황에서 내 역할을 그다지 크게 보지도 않았다. 만약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 해도,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였을 것 같다. 그런데 엄마는 사건이 벌어지는 순간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그렸고, 위기를 극복하는 데 자신의 역할이 결정적이라고 보았으며,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그건 자기 책임이라고 믿은 것이다. 그건 엄마가 평생 동안 가족을 대해온 태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건 지구의 운명을 짊어진 슈퍼맨의 태도이다.

 

 

22164e8ed444f324c31529675428e164_1442416


의인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엄마는 토마처럼 영웅 서사의 주인공으로 살고 있는 게 아닐까. 나는 침대 발치에 앉아 1935년생의 여자아이를 떠올려보았다. 대가족 틈에서 상고머리에 검정치마저고리를 입고 수줍게 카메라를 응시하던 아이. 내가 그랬듯이 그 아이도 어떤 이야긴가에 꽂혀 자기가 그 주인공인양 살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이야기 주인공과는 다른 자기 자신과 마주하게 되는 불편한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아이는 영웅이 아닌 자기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아니, 아이는 영웅이 아닌 채로도 그가 속한 사회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었을까. 사회는 영웅서사를 제공하고 약자에게 영웅되기를 강요한다. 나는 끝내 받아들여질 가망이라곤 없이 부정되고 포기돼야 했던 엄마의 다른 모습을 떠올려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토마가 이미 토토인 것처럼 엄마는 이미 너무 엄마다.    

   나는 똘만이 사건을 뼈아픈 기억으로 간직해왔다. 그로 인해 이야기 밖으로 내던져졌고, 현실에서 비루한 나 자신을 마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 사건에 대한 그간의 해석을 수정하려고 한다. 그때 나는 이야기 밖으로 내던져짐으로써 영웅이 아닐 수 있는 자유, 비루하면 비루한대로 나 자신으로 사는 자유를 얻은 것이라고 말이다.      



 

 

[이 게시물은 MVQ님에 의해 2016-03-02 10:52:02 댄스댄스댄스에서 이동 됨]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mail : mvqblog@gmail.com